《이방인》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따라오는 말은 ‘무감정’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 다음 날 바다에 가고 연애를 시작한 사람, 해변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사람. 뫼르소의 행동을 몇 줄로 나열하면 그가 세상과 단절된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인물을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으로 읽으면, 이야기가 던지는 더 까다로운 질문을 놓치기 쉽다. 감정이 없는 것과 남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 《이방인》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바탕으로 1938년 알제의 뫼르소를 따라간다. 장례식 이후 마리와 가까워지고, 이웃 레몽의 일에 휘말리며, 한여름 해변의 비극으로 나아간다. 원작을 이미 아는 관객에게도 사건의 순서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일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직접 볼 수 없으면서도 표정과 말투만으로 진심의 크기를 재곤 한다.

장례식에서 눈물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슬픔이 없었다는 증거일까. 애도의 모습에는 사회가 공유하는 문법이 있다. 적당히 침묵하고, 기억을 말하고, 울어야 할 때 우는 문법이다. 뫼르소는 그 문법을 따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사실 이상으로 읽는다. 남과 다른 반응이 곧 도덕적 결함이라는 판단으로 미끄러지는 순간, 질문은 ‘그는 무엇을 했는가’에서 ‘그는 왜 우리처럼 보이지 않는가’로 바뀐다.
물론 이 질문이 해변의 폭력을 가볍게 만들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사건의 피해자와 식민지 알제라는 장소를 흐리지 않으면서 뫼르소에게 쏟아지는 시선까지 함께 봐야 한다. 인물의 불투명함에 매혹될수록 그가 저지른 행위의 무게를 지워서는 안 된다. 오종이 이 이야기를 다시 영화로 옮긴 지금, 카메라가 누구에게 얼굴과 시간을 주는지, 누구를 배경에 머물게 하는지 살펴보는 일도 중요해진다.
여기서 햇빛과 열기는 단순한 배경 이상의 감각으로 읽힌다. 사건을 말로 정리하려는 목소리와 몸이 먼저 받아들이는 눈부심 사이에는 틈이 있다. 소설이 독자를 뫼르소의 건조한 문장 가까이에 붙여 놓았다면 영화는 빛, 얼굴, 거리와 침묵을 통해 그 틈을 보여줄 수 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감각이 실제 화면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확인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텍스트에 익숙한 마음이 영상 앞에서 어디까지 바뀌는지, 그 차이를 곱씹는 관람이 될 것 같다.
나는 《이방인》의 질문이 ‘차가운 사람을 이해하자’는 쉬운 결론으로 끝나지 않는 점이 좋다. 누군가의 표정을 읽지 못할 때 우리는 그 빈칸을 자기 확신으로 메운다. 평소에는 친절해 보이는 판단 방식이 재판과 같은 자리에서는 한 사람의 삶 전체를 규정하는 힘이 된다. 마음을 증명하라고 요구받는 사람이 과연 어떤 말로 그 요구에 답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며 뫼르소의 무표정만 세기보다, 그 얼굴에 의미를 붙이는 사람들의 언어를 함께 따라가고 싶다. 아무 감정이 없어서 낯선 존재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감정의 모양을 돌려주지 않아서 낯선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두 가능성 사이의 불편한 거리를 견디는 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뫼르소에 대한 간단한 판정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을 알아본다고 믿어 온 내 시선에 대한 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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