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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이창동, 8년 만의 신작으로 베니스 심사위원대상, 은사자상 — 왜 세계는 다시 이창동을 주목하는가

by onfind 2026.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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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24년 만에 다시 은사자상

《가능한 사랑》과 그가 바라보는 인간

2026년 9월, 베니스에서 한국영화에 꽤 오래 기억될 장면 하나가 만들어졌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Possible Love)》이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 심사위원대상(Silver Lion – Grand Jury Prize)을 수상했다.

베니스영화제에는 두 종류의 은사자상이 있다. 하나는 심사위원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감독상이다. 올해 감독상은 《DAU》의 일리야 흐르자놉스키에게 돌아갔고, 이창동의 《가능한 사랑》은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한국영화가 이 부문의 은사자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이창동에게 '은사자'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24년 전인 2002년.

《오아시스》로 같은 베니스에서 은사자상 감독상(Silver Lion – Award for Best Director)을 받았기 때문이다.

같은 은사자상이지만 서로 다른 상이다.

2002년에는 감독 이창동에게 주어진 감독상이었고, 2026년에는 영화 《가능한 사랑》에 주어진 심사위원대상이다.

24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그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은사자를 갖게 됐다.

그 사이 이창동은 《밀양》을 만들었고, 《시》를 만들었고, 《버닝》을 만들었다.

그리고 《버닝》 이후 8년 동안 장편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그 긴 침묵 끝에 그가 다시 영화관으로 가지고 돌아온 이야기는 놀랍게도 거대한 사건이나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두 부부의 이야기다.


두 부부가 서로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가능한 사랑》에는 네 사람이 등장한다.

전도연, 설경구, 조여정, 조인성이 각각 두 부부를 연기한다.

한쪽에는 해고 노동자와 그의 아내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노동 문제를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감독과 경제적으로 풍족한 남편이 있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두 부부의 삶이 서로 교차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씩 욕망과 질투, 동경과 불만이 모습을 드러낸다.

흥미로운 것은 이창동이 이들을 단순하게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영화에서 계급은 숫자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통장 잔액이나 자동차, 집의 크기보다 훨씬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계급은 감정이 된다.

상대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고,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발견하는 순간의 열등감이 되고,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된다.

이것은 이창동이 오랫동안 영화를 통해 바라보아 온 세계이기도 하다.


이창동의 영화에는 늘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이 있었다

1997년 《초록물고기》의 막동은 군대를 제대하고 돌아왔지만 자신이 돌아갈 자리를 찾지 못한다.

2000년 《박하사탕》의 영호는 한 개인의 삶이 시대의 폭력과 함께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거꾸로 따라간다.

2002년 《오아시스》에는 사회가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두 사람, 종두와 공주가 있다.

2007년 《밀양》의 신애는 견딜 수 없는 상실을 경험한다.

2010년 《시》의 미자는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지만 자신이 마주한 현실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리고 2018년 《버닝》의 종수에게는 돈도, 안정적인 직업도, 확실한 미래도 없다.

이창동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세상의 중심에서 조금씩 밀려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들을 영웅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불쌍한 피해자로만 그리지도 않는다.

그저 오래 바라본다.

그 사람이 어떻게 먹고, 걷고, 말하고, 사랑하고, 상처받는지를 바라본다.

그래서 이창동의 영화에서 사회 문제는 거대한 구호의 형태로 등장하지 않는다.

실업과 빈곤, 장애, 국가 폭력, 계급, 종교, 노화 같은 문제가 한 사람의 일상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말 이해할 수 있는가.


《오아시스》에서 《가능한 사랑》까지, 24년

그래서 이번 수상은 2002년 《오아시스》와 함께 보면 더 흥미롭다.

《오아시스》 역시 결국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이야기였다.

전과자 종두와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

사회는 두 사람을 정상적인 관계의 바깥에 놓는다.

그러나 영화는 묻는다.

누가 이들의 사랑이 가능하지 않다고 결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24년이 지나 이창동은 제목 자체에 다시 '사랑'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가능한 사랑》.

Possible Love.

확실한 사랑이 아니다.

불가능한 사랑도 아니다.

가능한 사랑이다.

그 사이 이창동이 바라보는 세계는 훨씬 복잡해졌다.

하지만 질문은 어쩌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정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가.


《밀양》에서는 신에게 질문했다

《밀양》에 이르면 이 질문은 더욱 잔인해진다.

신애는 아들을 잃는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종교를 통해 구원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듣는다.

그는 이미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신애가 용서하기도 전에 신이 먼저 그를 용서해 버린 것이다.

이 순간 영화는 종교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우리는 정말 이해할 수 있는가.

신조차 그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이창동 영화의 질문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시》에서는 아름다움을 질문했다

《시》의 미자는 시를 배우기 시작한다.

선생은 사과를 제대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사과를 수천 번 바라봐야 진짜 사과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자가 바라봐야 하는 현실은 아름답지 않다.

손자가 끔찍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자는 시를 쓰려고 한다.

여기에서 이창동은 이상한 질문을 던진다.

세상이 이렇게 잔인한데도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가.

어쩌면 시는 현실에서 도망치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더 오래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이창동의 영화 자체에 대한 설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버닝》에서는 진실조차 사라졌다

《버닝》에 오면 질문은 더욱 모호해진다.

종수는 해미를 만난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벤이라는 남자를 데려온다.

벤은 부유하고 세련되어 있다.

하지만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느 날 해미가 사라진다.

벤은 정말 해미를 죽였을까.

해미는 정말 죽었을까.

종수가 믿고 있는 것은 사실일까.

영화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관객 역시 종수와 똑같은 위치에 놓인다.

불완전한 정보만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영화를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종수와 벤 사이에는 거대한 계급의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은 아무것도 갖지 못했고,

다른 사람은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종수는 그 차이가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 이해할 수 없음이 분노가 된다.


그리고 《가능한 사랑》에서는 다시 노동으로 돌아온다

이번 작품의 출발점에는 실제 한국 사회의 노동 문제가 있다.

이창동 감독은 2009년 대규모 정리해고와 파업 진압으로 이어졌던 노동자들의 경험을 오랫동안 영화로 옮길지 고민해왔다.

당시의 현실을 이미 강력한 다큐멘터리가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처음에는 이를 극영화로 만드는 것을 망설였다고 밝혔다.

그러다 2024년 공동각본가 오정미와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했고, 노동 문제를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넣으면서 지금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결국 《가능한 사랑》은 노동에 관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노동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가 됐다.

그리고 이 주제는 2026년이라는 시대와도 묘하게 겹친다.

AI와 자동화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우리는 다시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던 일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면 노동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직업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득을 잃는 것일까.

아니면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존엄을 잃는 일이기도 할까.

배우 조인성 역시 베니스에서 AI의 등장과 인간 노동 가치의 상실 가능성을 언급하며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계속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30여 년 동안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바라보아 온 이창동의 영화가 다시 '노동'으로 돌아온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이창동 영화가 세계에서 읽히는 이유

이창동의 영화는 매우 한국적이다.

《박하사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국 현대사를 알아야 하고,

《버닝》의 종수와 벤 사이의 긴장을 이해하려면 한국 사회의 계급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가능한 사랑》 역시 한국 사회에서 실제로 벌어진 노동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그의 영화는 한국 밖에서도 읽힌다.

왜일까.

아마 질문이 특정 국가에 머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가.

고통받는 사람을 우리는 정말 이해할 수 있는가.

인간은 다른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는가.

아름다움은 고통 앞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결국,

사랑은 가능한가.

한국에서 시작된 이야기가지만 질문은 인간에게 향한다.


두 개의 은사자 사이에 놓인 24년

2002년 《오아시스》.

은사자상 감독상.

2026년 《가능한 사랑》.

은사자상 심사위원대상.

그 사이 24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창동은 《밀양》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배출했고, 《시》로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 《버닝》은 칸 경쟁부문에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평가를 얻었다.

하지만 작품 수는 놀랄 만큼 적다.

1997년 《초록물고기》 이후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가 연출한 장편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새로운 이창동 영화가 나온다는 것은 조금 특별한 사건이 된다.

오랜 시간 동안 하나의 질문을 붙들고 있는 감독이 다시 한번 우리에게 질문을 건네기 때문이다.

이번 질문은 제목에 이미 들어 있다.

가능한 사랑.

어쩌면 이창동은 30년 동안 같은 질문을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복잡하고 불평등하고 때로 잔인한 세계에서,

그래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가능한 사랑》은 그 질문에 대한 이창동의 새로운 대답이라기보다,

그가 우리에게 다시 건네는 질문에 더 가까운 영화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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