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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봉준호 영화는 왜 웃다가 갑자기 무서워질까? - 《살인의 추억》부터 《기생충》까지, 영화음악의 비밀

by onfind 2026.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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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영화는 왜 웃다가 갑자기 무서워질까?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을 따라가며 봉준호가 영화음악으로 장르와 관객의 감정을 전환하는 방법을 살펴봅니다.

 

봉준호 영화를 보고 있으면 가끔 이상한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분명 웃고 있었는데 갑자기 웃음이 멈춥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스꽝스럽던 사람이 몇 분 뒤에는 무섭게 보입니다. 반대로 긴장해야 할 것 같은 장면에서 이상하게 웃음이 터지기도 합니다.

《살인의 추억》도 그렇고, 《괴물》도 그렇고, 《마더》도 그렇고, 《기생충》도 그렇습니다.

봉준호 영화에는 코미디, 스릴러, 공포, 가족극, 사회극이 한 영화 안에서 계속 뒤섞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영화가 산만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여기에는 시나리오와 편집, 배우의 연기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놓치기 쉬운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음악입니다.

봉준호 영화의 음악을 자세히 들어보면 재미있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면이 슬프다고 음악까지 반드시 슬프지 않습니다.

화면이 무섭다고 음악까지 반드시 무섭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정반대입니다.

사기를 치는데 우아한 바로크풍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이 서로 죽일 듯 싸우는데 느긋하고 밝은 노래가 등장합니다.

봉준호에게 음악은 단순히 장면의 감정을 설명하는 배경음악이 아닙니다.

관객이 서 있는 감정의 바닥을 움직이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특징은 《기생충》에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초기작부터 그의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조금씩 선명해집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기생충》까지. 봉준호 영화의 장르는 계속 달라졌지만 웃음과 공포, 비극이 한 장면 안에서 충돌하는 방식은 계속 이어져왔다.

 

 


《살인의 추억》 — 연쇄살인 영화인데 왜 음악은 슬플까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장르만 생각하면 음악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어두운 저음.

불안한 현악기.

범인을 추적할 때 점점 빨라지는 리듬.

그런데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음악은 조금 다릅니다.

《살인의 추억》 음악은 일본 작곡가 이와시로 타로가 맡았습니다.

영화의 음악에는 범죄 스릴러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서정적인 정서가 있습니다.

이 선택이 중요합니다.

영화의 중심이 단순히

“범인은 누구인가?”

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영화가 끝나고 남는 것은

“우리는 왜 그를 잡지 못했는가?”

라는 감정에 가깝습니다.

봉준호 역시 실제 사건을 영화화하면서 범인 자체보다 그 시대의 분위기와 당시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음악 역시 범인을 쫓는 스릴러의 박자만 따라가지 않습니다.

사라져버린 시간.

무능했던 수사.

폭력적이었던 시대.

그리고 끝내 해결하지 못했던 사건.

그 모든 것을 뒤늦게 돌아보는 듯한 정서가 음악에 스며듭니다.

영화 제목이 왜 《살인의 추억》인지 음악을 듣고 있으면 조금 더 이해하게 됩니다.

살인보다 중요한 단어가 어쩌면

‘추억’일지도 모릅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음악은 범인을 쫓는 긴장감만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잡지 못한 범인과 사라진 시간, 그 시대를 뒤돌아보게 만든다.

 


봉준호 영화에는 장르 사이에 벽이 없다

여기서 봉준호 영화의 중요한 특징 하나가 보입니다.

그의 영화에서는 장르가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습니다.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 스릴러인데 형사들의 행동 때문에 웃음이 터집니다.

그런데 웃고 있는 순간 실제 희생자가 등장합니다.

웃음이 순식간에 죄책감으로 변합니다.

《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괴수영화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가족영화이고 코미디이고 사회풍자극입니다.

이 장르들은 차례대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존재합니다.

음악도 그 복잡한 감정을 따라 움직입니다.


《괴물》 — 괴수가 나타났는데 가족들은 왜 이렇게 우스울까

《괴물》에서 가장 봉준호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가족들이 현서의 영정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상황만 보면 비극입니다.

딸이 괴물에게 잡혀갔습니다.

가족들은 현서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슬퍼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가족의 울음은 점점 이상해집니다.

바닥을 구르고, 서로 붙잡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울부짖습니다.

분명 슬픈데 이상하게 웃깁니다.

그리고 관객은 곤란해집니다.

이 장면에서 웃어도 되는 걸까?

바로 이 불편한 위치가 봉준호가 관객을 자주 데려가는 자리입니다.

비극과 희극 사이.

웃음과 죄책감 사이.

공포와 우스꽝스러움 사이.

《괴물》의 음악은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이병우가 맡았습니다.

영화 역시 음악을 단순히 괴수의 공포를 증폭하는 방향으로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괴수영화라면 거대한 오케스트라로 괴물의 위압감을 강조할 수도 있었겠지만, 영화가 궁극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괴물보다 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괴물》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괴수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게 됩니다.

이것이 봉준호 영화의 장르 이동입니다.

 

괴수가 한강을 습격하는 영화인데 어느 순간 가족극이 되고, 비극적인 오열 장면에서는 웃음까지 나온다. 《괴물》에서 봉준호식 장르 혼합은 더욱 대담해진다.

 


《마더》 — 영화가 시작하자 김혜자는 왜 춤을 출까

영화가 시작합니다.

넓은 들판에 김혜자가 혼자 서 있습니다.

잠시 후 음악이 흐르고,

갑자기 춤을 춥니다.

《마더》의 첫 장면입니다.

처음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는 매우 이상한 장면입니다.

왜 춤을 추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즐거워서 추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멍한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무서워 보이기도 합니다.

봉준호는 이 오프닝을 통해 어머니의 광기와 고독 같은 정서를 미리 심어놓으려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장면이 더욱 놀라운 이유는 영화가 끝나면 알 수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에도 다시 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닙니다.

관광버스 안입니다.

수많은 중년 여성 사이에 섞여 춤을 춥니다.

처음에는

혼자 춤춘다.

마지막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춤춘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들어갔는데 오히려 더 외롭게 느껴집니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반복되는 춤. 처음에는 기묘했던 장면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고독과 망각의 이미지로 전혀 다르게 보인다.

 


《마더》에서 춤과 음악은 설명이 아니라 수수께끼다

보통 영화의 첫 장면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마더》의 첫 장면은 이야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문을 던집니다.

저 여자는 왜 춤을 추고 있을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질문이 바뀝니다.

저 여자는 무엇을 잊으려고 춤을 추고 있을까?

같은 이미지가 영화의 앞과 뒤에서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봉준호가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음악이 장면의 의미를 고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금 비틀어놓습니다.

그래서 관객의 감정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설국열차》 — 이번에는 영화도 음악도 앞으로 달린다

봉준호의 첫 영어권 장편 프로젝트인 《설국열차》에서는 음악의 규모도 달라집니다.

음악을 맡은 사람은 마르코 벨트라미(Marco Beltrami)입니다.

《설국열차》의 구조는 매우 독특합니다.

인류의 생존자들이 거대한 열차 안에서 살아갑니다.

꼬리칸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고,

앞쪽으로 갈수록 지배계층의 공간이 나옵니다.

주인공들은 열차의 뒤에서 앞으로 이동합니다.

그래서 영화 자체가 거의 하나의 직선 운동입니다.

뒤 → 앞.

객차 하나를 통과할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등장합니다.

감옥.

수족관.

교실.

클럽.

그리고 엔진.

장르도 함께 변합니다.

액션영화였다가,

풍자극이 됐다가,

기괴한 코미디가 됐다가,

다시 잔혹한 액션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에서 음악 역시 영화의 추진력을 만드는 데 참여합니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장르가 이동하는 방식이 공간의 이동과 결합한 사례입니다.

 

 

《설국열차》에서는 객차 하나를 통과할 때마다 공간뿐 아니라 영화의 장르와 리듬까지 달라진다. 음악 역시 뒤에서 앞으로 달려가는 영화의 추진력에 참여한다.


그리고 정재일이 등장한다 — 《옥자》

봉준호 영화음악에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는 작품이 《옥자》입니다.

이 작품에서 정재일과 봉준호의 본격적인 협업이 시작됩니다.

이후 두 사람은 《기생충》에서도 함께했고 《미키 17》까지 협업을 이어갑니다.

정재일은 봉준호가 음악에 관한 비전이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면서도 작곡가에게 창작할 공간을 주는 감독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옥자》 자체도 봉준호다운 장르 혼합이 두드러지는 영화입니다.

미자와 옥자가 함께 있는 순간은 동화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어느 순간 기업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다시 추격극이 되고,

후반에는 상당히 잔혹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동화와 코미디, 모험영화와 사회풍자가 하나의 영화 안에서 끊임없이 교차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만난 봉준호와 정재일의 협업은 다음 작품에서 훨씬 더 강력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바로 《기생충》입니다.

 

 

《옥자》에서 시작된 봉준호와 정재일의 협업은 《기생충》으로 이어진다. 동화 같은 순간과 자본주의의 잔혹함이 충돌하는 영화의 변화에 음악도 함께한다.


《기생충》 — 봉준호 영화음악의 결정판

《기생충》의 음악을 다시 들어보면 놀라울 정도로 클래식합니다.

현악기.

하프시코드.

바로크 음악을 연상시키는 구조.

정재일은 영화의 부잣집과 가난한 집이라는 두 공간을 보며 두 세계를 아우를 집중된 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현악기를 중심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봉준호는 바로크 음악이라는 방향을 제안했습니다.

정재일은 이 음악이 우아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하고 기묘하다는 점에서 《기생충》과 잘 맞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이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우아한데 어색하다.

바로 《기생충》이라는 영화 자체와 닮았습니다.

 

 

반지하에서 박 사장의 저택으로. 《기생충》에서 위와 아래의 공간은 계급을 보여주고, 이러한 영화의 구조는 정재일의 음악에도 반영된다.


가짜 가족에게 '가짜 클래식'을 들려주다

《기생충》의 유명한 몽타주를 떠올려봅시다.

기택 가족이 박 사장 집에 하나씩 침투합니다.

기우가 들어가고,

기정이 들어가고,

기택이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충숙까지 들어갑니다.

그러기 위해 기존 운전기사와 가정부를 몰아냅니다.

한마디로

사기극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흐르는 음악은 놀랍도록 우아합니다.

대표곡이 〈믿음의 벨트(The Belt of Faith)〉입니다.

봉준호는 이 장면에 대해 화면 속 인물들은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고 있는데 음악은 우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게 봉준호식 영화음악의 핵심입니다.

보통이라면

사기 → 익살스러운 음악

혹은

사기 → 긴장되는 음악

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봉준호는

사기 → 우아한 바로크

로 갑니다.

 

 

가짜 신분으로 부잣집에 들어가는 가족과 우아한 바로크풍 음악. 《기생충》에서는 음악 자체가 블랙코미디에 참여한다.


왜 이 음악이 그렇게 재미있을까

이 장면에서는 모든 것이 가짜입니다.

가짜 대학생.

가짜 미술치료사.

가짜 운전기사.

가짜 가정부 소개업체.

그런데 음악까지 어딘가 진짜 바로크 음악처럼 들립니다.

정재일은 봉준호의 바로크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이 스타일을 연구했고, 화면의 동작과 맞추기 위해 음악의 박자에도 변화를 주었습니다.

가짜 신분으로 부잣집에 들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진짜 클래식처럼 들리는 새 음악.

영화의 내용과 음악의 형식 자체가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BGM이 아닙니다.

음악도 영화의 블랙코미디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봉준호는 음악을 일부러 화면과 싸우게 한다

《기생충》 후반부에는 더욱 극단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박 사장 가족의 생일파티.

밝은 음악이 들립니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사람들이 즐겁게 파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아래에서는 점점 어두운 음악이 올라옵니다.

표면에서는 행복한 음악.

아래에서는 절망을 표현하는 음악.

생각해보면 이것은 영화의 공간 구조와도 닮았습니다.

위에서는 파티가 열립니다.

아래에서는 비극이 진행됩니다.

위에는 행복.

아래에는 절망.

음악 역시 서로 다른 감정의 층을 만들어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영화음악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영화의 구조와 결합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웃는 걸까?

봉준호 영화의 가장 이상한 점이 여기 있습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웃음이 납니다.

《살인의 추억》에서도 그렇고,

《괴물》에서도 그렇고,

《마더》에서도 그렇고,

《기생충》에서도 그렇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음악과 화면이 항상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면은 비극인데 음악은 우아합니다.

화면은 위험한데 음악은 경쾌할 수 있습니다.

상황은 우스운데 그 밑에는 불길한 소리가 흐릅니다.

관객의 감정은 잠깐 혼란스러워집니다.

웃어야 하나?

무서워해야 하나?

바로 그 순간 봉준호는 장르를 바꿉니다.

코미디라고 생각했던 영화가 스릴러가 되고,

스릴러라고 생각했던 영화가 비극이 됩니다.

그래서 봉준호 영화의 장르 전환은 갑작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자연스럽습니다.

음악이 이미 관객의 발밑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생충》의 마지막 음악은 극장 밖까지 따라온다

그리고 영화가 끝납니다.

하지만 봉준호는 음악을 이용해 이야기를 한 번 더 현실로 끌어옵니다.

엔딩크레디트에 흐르는 노래는

〈소주 한 잔〉.

정재일이 작곡하고,

봉준호가 직접 가사를 썼으며,

기우를 연기한 최우식이 노래합니다.

봉준호는 관객들이 극장을 나갈 때 마지막으로 기우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기우는 거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돈을 벌어 집을 사고,

아버지를 구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희망적인 상상을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다시 반지하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엔딩크레디트에서 들리는 것은 영웅적인 음악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소주 한 잔을 마시는 평범한 사람의 노래입니다.

판타지가 끝나고 다시 현실입니다.

음악이 관객을 영화 밖 현실까지 데려다 놓습니다.


봉준호 영화음악의 비밀은 '좋은 음악'에만 있지 않다

봉준호 영화의 OST를 따로 들어보면 좋은 음악이 많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음악 자체보다

음악을 어디에 놓느냐입니다.

슬픈 음악을 얼마나 아름답게 작곡했느냐보다

왜 이 장면에 이 음악을 넣었는가.

왜 화면과 반대되는 음악을 선택했는가.

왜 여기에서 갑자기 음악을 바꿨는가.

이 질문들이 중요합니다.

봉준호는 음악으로 관객에게

“지금 슬퍼하세요.”

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감독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감독에 가깝습니다.

“지금 웃고 있죠?”

그리고 잠시 뒤 묻습니다.

“그런데 정말 웃어도 될까요?”


그래서 봉준호 영화는 웃다가 갑자기 무서워진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형사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 뒤에 실제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괴물》에서는 가족의 코미디 뒤에 상실과 시스템의 무능이 있습니다.

《마더》에서는 춤 뒤에 고독과 광기가 숨어 있습니다.

《기생충》에서는 우아한 바로크풍 음악 뒤에 계급과 폭력이 있습니다.

봉준호는 이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하나의 영화 안에 놓습니다.

그리고 음악은 그 사이를 연결합니다.

때로는 관객을 속이고,

때로는 안심시키고,

때로는 경고하고,

때로는 화면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봉준호의 영화에서 음악은 단순한 감정의 증폭기가 아닙니다.

감정의 방향전환 장치입니다.


영화음악을 들으면 봉준호의 연출이 보인다

다음에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 《기생충》을 다시 본다면 잠시 배우의 대사보다 음악을 먼저 들어봐도 좋겠습니다.

특히 이런 순간입니다.

화면과 음악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순간.

아마 그때가 봉준호가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순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관객이 웃고 있을 때 불안을 집어넣고,

긴장하고 있을 때 웃음을 끼워 넣고,

우아한 음악으로 사기극을 보여주고,

행복한 파티 아래 절망을 숨깁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장르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봉준호 영화에서 장르가 바뀌는 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화면이 바뀌기 전에 음악이 먼저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봉준호 영화가 웃기면서 무섭고,

무서우면서 슬프고,

슬픈데도 다시 웃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음 편 — 같은 정재일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여기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질문이 생깁니다.

《기생충》의 음악을 만든 사람이 정재일입니다.

그런데 정재일은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에서도 음악을 맡았습니다.

같은 작곡가입니다.

그런데 두 감독이 음악을 바라보는 방식은 상당히 다릅니다.

봉준호는 정재일에게 구체적인 음악적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 화면과 음악의 관계를 세밀하게 만들어가는 감독입니다.

반면 이창동은 음악이 장면을 지나치게 설명하는 것을 오랫동안 경계해왔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정재일의 음악도 감독에 따라 달라질까요?

다음 편에서는 정재일이라는 한 작곡가를 중심에 놓고 그의 음악 세계와 봉준호·이창동이라는 두 감독이 정재일의 음악을 어떻게 다르게 사용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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